Dohyun Gracia Shin

뮤지컬 레드북 (2017) 리뷰: 오스틴 로맨스 서사의 반란_안나 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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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레드북 (2017) 리뷰: 오스틴 로맨스 서사의 반란_안나 편

Gracia Shin 2019.09.14 03:04

이미지 출처: https://www.sedaily.com/NewsVIew/1RVMIZCJR0

 

​레드북

 

안나: 유리아

브라운: 박은석

로렐라이: 지현준

존슨: 김태한

도로시/바이올렛: 김국희

장예원 주민진 윤정열 권용국 허순미 김상균 이다정

 

 

 

뮤지컬 <레드북>: 오스틴 로맨스 서사의 반란_안나 편

 

잘 사는 집의 남자와 가난한 여자. 남자는 대개 당대사회에서 바람직하게 여기는 남성상 그 자체이며, 여자는 똑 부러지는 성격의 아름다운 20대 여성이다. 성격차이나 사소한 오해로 티격태격대던 그 둘은 이내 어떤 중대한 사건으로 서로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사랑에 빠지게 되어, 결국은 결혼으로 책은 마무리된다. <오만과 편견>의 리지와 다시도, <엠마>의 엠마와 나이틀리도, <설득>의 앤과 웬트워스도. 오스틴이 창조해낸 많은 커플들은 이 클리셰의 절차를 밟는다. 무리도 아니다. 오스틴은 바로 이 로맨스 전통을 완성한 클리셰의 장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스틴의 로맨스 서사는 세월이 돌고 돌아도, 여러 모습으로 변주되지만 그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은 채 이어져왔다.

 

뮤지컬 <레드북> 역시 오스틴의 로맨스 서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잘 사는 집의 변호사 브라운과 여자인데도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는 하녀 출신의 가난한 안나. 브라운은 전형적인 영국신사에, 빅토리아 시대가 바람직하게 여겼던 중산층 자수성가형 변호사 (self-made man)이며, 안나는 똑 부러지는 성격의 아직 “30이 되지 않은” 여성이다. 성격과 관점 차이로 다투던 둘은 안나가 존슨과의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서로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하고 사랑에 빠진다. 이 극에서 결혼은 분명히 암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결혼하지 않고서는 성숙한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 하던 빅토리아 시대 사회 상, 헤어지지 않았다면 둘은 결혼을 했을 것이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안나와 브라운이 다이아 반지로 농을 하는 모습이 드러나 있는 걸 보아 이는 어쩌면 결혼에 대한 암시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단지 오스틴 로맨스 서사의 답습이라면 뮤지컬 <레드북>이 이렇게 화제를 모았을까? 혹은 더 나아가, 오스틴 로맨스 서사가 그저 한 쌍의 남녀가 티격태격 싸우다 결혼하는 내용일 뿐이라면 오스틴이 영국문학사에 길이 남는 작가가 되었을까? 아니니 이 글을 시작했다. 우선 후자의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자면, 오스틴은 사실 보수와 진보의 평 사이에서 줄을 타는 작가라는 말로 입을 열어야겠다. 오스틴의 작품은 사회에 대한 비평을 전면적으로 하는 작품은 아니라고 알려져있다. 오스틴의 작품들이 흔히 받는 평가 절하는 그저 "여류작가"의 "로맨스 소설"이라는 것. 하지만 오히려 이는 오스틴의 작품의 강점이다. 오스틴은 소소하게 인물 개인들의 작은 세계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그 세밀한 세계를 세심히 뜯어보면, 오스틴이 그녀 주변에서 느낀 부조리들이 인물의 세계 속에 녹아있다. 아픈 아이를 돌봐야 하느라 파티에 못 가게 되자 “왜 엄마인 나만 육아를 해야해?”라고 투덜대는 <설득>의 메리. 남편과 사별하고 허드렛일을 하며 사회경제적 곤란을 겪는 많은 과부들. 어머니가 죽고 대외적으로 아버지의 아내 노릇도 해내야 하는 장녀. 남편과 함께 마차를 모는 씩씩한 아내. 오스틴 작품 속의 다양한 인물들은 오스틴이 여성으로서 느꼈던 부조리들을 여러 형태로 보여준다. 

 

하지만, 오스틴이 보수적이라는 평을 받는 이유는 이 코멘트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오스틴 작품의 여주인공들은 당돌할지 언정 제인 에어는 되지 못 한다. 여주인공은 결국 결혼으로 해피엔딩을 맞는 20대의 아름다운 처녀이다. 사회적 코멘트를 하는 인물들은 주연이 아니다. <설득>의 메리는 투정을 부리는 철없는 아내로 읽히기 십상이고, 남편과 함께 마차를 모는 씩씩한 아내는 사회적 시선에서 남성스러운 신체적 특성을 부여받아 안드로지니적 특성을 지닌다. 마땅히 사랑받게 될 여주인공인 리지가, 엠마가, 앤이 이러한 불평불만을 쏟아내지는 않는다. 오스틴은 조연에게 슬쩍 그녀의 코멘트를 들려 보낸다. 혹은 빙빙 돌려 숨기듯 불평한다. 이는 당대의 사회 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제인 에어>와 같은 프로토 페미니스트 타입의 인물들이 등장했다. 예쁘지 않아도 괜찮은 여주인공. 스스로 돈을 버는 여주인공.

 

<레드북>의 안나는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이지만 현대에 창조된 인물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는 자유로이 말하고 행동한다. 오스틴 로맨스 서사의 전형적 여주인공처럼 보이지만 현대에서 창조한 변종인 셈이다. <레드북>은 이와 같이 오스틴 로맨스 서사를 빌린 뒤 비틀어 현대에 코멘트를 날린다. 안나도, 브라운도, 다른 인물들도. 과거의 시대상은 현대에서 새 옷을 입고 스스로가 빌린 로맨스 서사를 패러디하며 꼬집어 풍자한다.

 

우선, 안나는 오스틴이 숨겨서 표현했던 불편함을 자신의 목소리로 떠들고 외치는 여주인공이다. <레드북>의 첫 시작에서 구직하는 안나에게 퍼부어지는 질문들은 실제로 오스틴 소설의 여주인공들이, 그들의 여성친구들이, 책 밖의 수많은 여성이 대면했던 질문들이다. 

 

 

“여자잖아? 늙었잖아? 결혼도 못 했잖아? 

그런데 왜 여자가 일을 하려고 해 남자가 없어? 몸은 잘 써? 그 날이야?”

 

 

<오만과 편견>의 베넷 가 여식들이 사교계에 데뷔하려고 왜 그렇게 애를 썼던가. 당대 여성들은 10대 중반에는 사교계에 데뷔하여 자신을 상품 진열대에 올려놓아야 했다. 사교계 파티에서 춤을 추는 행위는 로맨틱해 보일 수는 있어도 사실은 맛보기상품인 셈이다. 실제로 소녀들은 파티장에서 손목에 그 날 춤추기로 한 남성들 이름이 순서대로 적힌 리스트 수첩을 걸고 다녔을 정도니까! 또 이야기해보자면 미스(Miss)라는 칭호는 본디 첫째 딸이 받는 칭호다. 미스 베넷. 베넷 가가 처음으로 시집 보내야할 처녀란 뜻이다. 이 칭호는 미스 베넷이 미세스 빙글리가 되면 그 다음 순서의 딸이 물려받게 된다. 이런 세상에서 20대 후반은 말그대로 노처녀 취급을 받는다. 보통 이십대 초반에 순서대로 착착 시집 가는 게 그 당대의 자연스러운 수순이기 때문. 오스틴의 마지막 소설 <설득>의 앤도 스물 일곱의 나이에 그렇게 노처녀 취급을 받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결혼도 못 한 여자는 그 역할을 못 다하는 취급을 받곤 한다. <레드북> 시대는 보아하니 남녀의 역할 구분이 철저한 중산층 빅토리아 중기 시대 남녀의 이야기 같은데, 결혼하지 못 해 아이를 낳지 않고 집 안의 천사 (Angel in the house) 기능을 하지 못 하는 안나는 그야말로 사회에서 쓸모 없는 인재인 셈이다. 게다가 <레드북>에서도 언급하였듯 당대 여자들은 스스로 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었다. 왜? 사실 간단하다. 안나는 안나가 아니라 로커 가문의 딸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소유물이다. 사실 안나가 작중에서 자유로이 활동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아버지와 절연하여 그 영향권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안나가 결혼하게 되면 안나는 더 이상 안나가 아니라 미세스 누군가가 된다. 이번에는 남편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나는 재산도 투표권도 가질 수 없다. 이런 걸 coverture라고 하는데 요는 딸은 아빠의 존재의 부속품이며 아내는 남편과 말그대로 한 몸이라는 이야기다. 한 몸이기 때문에 재산을 스스로 소유할 이유도 없고 투표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안나가 투표를 하면 한 사람, 즉 브라운이 투표를 두 번 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대신 안나는 고용주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몸을 잘 써서 밖에서 노동하며 고생한 남편에게 즐거움을 주고 집안의 천사로서 보듬어주는 역할을 다 해야하는 것이다. 여자들이 이에 대해 불평하고 짜증을 부리면 그 “신사”들은 그들을 히스테리아 환자로 몰았다. 여자는 “그 날” 같이 자연과 호르몬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고, 여자만이 걸리는 병 히스테리아에 걸려 변덕스럽게 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히스테리아는 자궁에서 유래한 용어 그대로 여성만이 걸리는 병은 아니고, 현대에서는 전환장애라고 불리는 증상의 극히 일부이다. 욕구를 억눌러야만 했던 당대 여성들이 전환 장애를 많이 겪었을 뿐. 이 용어는 아직도 노처녀 히스테리 등의 이름으로 그 차별적 시선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왜 이렇게 집적거리세요? 아 발정 나셨어요? 

생긴 건 고자같이 생긴 게 밝히긴 더럽게 밝히신다고요.

 

안나는 이와 같이 오스틴의 여주인공들이 겪어야 했던 부조리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내고 행동한다. 안나는 스스로가 대상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타인들이 어떤 소문을 내든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돌이키지 않는다. 본디 빅토리아 사회에서라면 절대 용납되지 않았을 일들을 안나는 거리낌없이 한다. 브라운과 한 방에 단 둘이 있는 것. 올빼미 소년의 집에 여자 혼자 방문하는 것. 결혼하기 전에 관계를 맺는 것. 여자가 감히 글을 쓰는 것! 

 

우리는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 이 작은 펜으로 커다란 성을 지어

언젠가 그들이 문학이 될 수 있게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게 성을 지어

억눌려온 욕망을 일으켜 넘쳐나는 광기를 불태워

 

안나는 상상을 머리 밖으로 꺼내 남들 앞에 보여주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비평에서 자주 이야기하듯 사실 상상은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이 그들을 억압하는 사회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숨 쉴 구멍이었다. <제인 에어>에서 제인이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간인 다락방을 어슬렁어슬렁 거닐며 창 밖 멀리 펼쳐진 평원을 보고 상상을 하였듯. 많은 여성인물들은 상상을 통해 광기에서 달아났다. 로렐라이의 작가들은, 그리고 안나는 남성만 휘두를 수 있었던 페니스, 아니 펜!을 감히 손에 쥐고 이 상상을 백지 위에 수놓는다. 이 펜은 무기가 되어 억압자들을 찌르기도 하고, 그들이 함께 하는 시스터후드(혹은 연대)를 지켜내고 다른 여성들을 해방하기도 한다. 이 기록과 상상의 힘이 안나를 특별하게 한다. 

 

더 나아가, 안나는 광기를 부정하고 스스로 나쁜 여자, 야한 여자, 타락한 여자 (fallen woman)이 되기를 택한다. 길버트와 구바가 Madwoman in the Attic에서 이야기하였듯, 당시 억압받는 여성이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다. 말 그대로의 신체적 도피, 단식, 그리고 광기로의 정신적 도피. 안나는 광기를 부정한다. 타인이 자신이 도망쳤다고 여기기를 거부하고 맞서 싸운다. 상대가 자신을 fallen woman으로 범주 지어 주홍글씨를 찍는다면 그 글씨를 기꺼이 받아들여 글씨의 사회적 효력 역시 거부한다. 그리고 남자들의 영역이었던 문학에 권력의 펜을 휘두르며 계속 침입하노라 선언한다. 

 

 

더 이상 상상 속에만 머물지 않아

나 같은 누군가에게 보여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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