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yun Gracia Shin

연극 더헬멧 (2018) 리뷰: 듣는다, 본다, 구해내어 말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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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더헬멧 (2018) 리뷰: 듣는다, 본다, 구해내어 말한다

Gracia Shin 2019.09.14 03:23

이미지 출처: 뉴스핌 (http://m.newspim.com/news/view/20180103000173)

 

연극 마니아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대학로의 ‘지탱’ 콤비, 지이선 작가와 김태형 연출이 아트원 씨어터 3관에서 연극 <더 헬멧>으로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을 통해 폭력에 대한 코멘트를 남긴다는 점에서 <더 헬멧>은 <모범생들>(지이선 작, 김태형 연출), <카포네 트릴로지>와 <벙커 트릴로지>(제스로 컴튼 작, 지이선 윤색, 김태형 연출)의 맥을 함께 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제 면에서 그들의 대학로 행보는 말 그대로 뚝심 그 자체다. 아이들의 소사회, 학교 속의 ‘백색느와르’을 그린 <모범생들>을 통해 한국 지역사회의 특성을 드러내는 구조적 폭력에 대한 서사를 창작하고, 트릴로지 시리즈를 윤색하여 사회와 전쟁의 구조적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공간을 이용하여 참신한 시도를 하였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맥은 ‘폭력’과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시선’으로 보인다. 2016년 <벙커 트릴로지>의 연출가의 말에서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카포네 트릴로지>를 통해 마피아에 의해 방에 갇힌 시대를 사는 모습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면, 이번엔 그야말로 전쟁 한복판입니다. (. . .) 이 전쟁 같은 시대에 진실이 침몰하지 않도록, 제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공연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주제는 폭력, 독재, 정권, 전쟁 등에 의해 무너진 ‘일상성’의 회복을 위해 싸우고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위는 <더 헬멧> 프로그램 속 연출의 말이다. 이 뚝심 혹은 치열한 고민이 <더 헬멧>을 이끌어오지 않았을까. 하나의 관객으로서 바라본 이 작품, <더 헬멧>은 ‘역사의 수복 과정’이라는 키워드로 이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프레스콜 질의응답 세션에서는 ‘일상성의 수복’이라는 언어로 표현이 되었던 이 말은 가려져 소외되었던 타자들의 서사를 드러내어 역사를 다시 쓰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시 보여야, 이야기되어야 일상에 편입하기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타자들은 일상에서 바닥에 깔린 채 그래도 당연한 것들로 슬쩍 치부된다.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더 헬멧>의 두 이야기 ‘룸 알레포’와 ‘룸 서울’은 공식적인 역사 속에서 슬그머니 가려진 타자들의 이야기를 되살린다. ‘룸 알레포’는 구미중심의 역사관에서 상대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 시리아 내전의 아픔을 재현하고, ‘룸 서울’은 공식적인 ‘펜’으로 써내려간 역사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여성인물들의 서사를 다시 쓴다.

    <더 헬멧>이 흥미로운 이유는 가려진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을 형식적으로도 구현해내기 때문이다. <더 헬멧>은 무대를 스몰 룸과 빅 룸으로 나누어 동시에 두 작은 작품을 공연한다. (스몰 룸은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빅 룸은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가운데를 가르는 벽은 특정한 때에 걷히기도 하고 투명해지기도 하며, 극중 소리는 벽 건너편으로 울리기도 하고 부러 크게 증폭되어 또렷하게 들리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반복되는 소리들과 대사들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뭐가 ‘반복’되었나를 중심으로 봐야 한다. 왜 가려야 하는가?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무엇이 들리고 무엇이 겹치는가? 왜 들려야 하는가? 왜 반복되어야 하는가? 너무나 당연한 물음이지만 이 리뷰는 그 질문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보다, 시야.

 

    그래서 가장 첫 질문부터 시작하였다. 왜 가려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룸을 가려야 하는 이유는, <더 헬멧>이 그 가려져 있는 칸을 걷어내고 보지 않고/못 하고 있던 것들을 드러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 헬멧은> 공간을 나누어 가리고 있던 칸을 걷거나 투명하게 하여, 가려져 있던 이들의 이야기를 베일 벗기듯 하나씩 차근차근 드러낸다. ‘룸 알레포’에서는 군인의 이야기에서 소마의 이야기, 그리고 목숨을 잃은 이브라힘의 이야기까지 점차 가려졌던 진실을 드러내면서 미처 보이지 않던 전쟁의 참상을 드러낸다. ‘룸 서울’에서는 억압되어 쪽방에 가둬져 있던 여성의 이야기가 당당히 문을 열고 나와 트라우마를 마주한다. 스몰 룸 안에 갇혀 있던 건 단순히 시고니만이 아닐 것이다. 몇 번이고 야단을 맞아 너무 맛있는 커피를 타게 된 ‘여’경 선동렬과 지금은 잊혔을지 모를 수많은 다른 시고니들이 시를 쓰며 거쳐 간 곳이기도 하리라. 아직도 많은 선동렬들과 시고니들은 보이지 않게 갇혀있다. 영화 <에일리언>의 ‘이빨 달린 질(바기나 덴타타)’ 모티프를 잇듯, 시고니는 구멍 속을 관음하다 손가락을 넣어 휘젓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손가락을 잡아 뜯는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시고니는 침범하는 페니스를 물어뜯는 ‘미친 개’이자 ‘이빨 달린 질’ 즉 ‘여성괴물’이다. 시고니는 젠더적 상징으로든 권력의 넓은 의미로든 ‘페니스’를 뜻하는 곤봉을 빼앗아 우뚝 선 대가리(마찬가지로 관습적인 페니스 상징)를 쳐서 자빠뜨리고 대신 ‘우뚝’ 올라선다. 이렇게 시고니들이 아무리 목소리를 내며 그들을 억압한 프랭크를 걷어차고 그의 상징적 페니스를 때려도, “여태껏 한국에는 없었던 METOO 운동”이라는 말 아래 묻혀 가려진다. 타자를 재조명하는 작업이란 그렇게 가려지는 서사들을 다시 찾고 문을 열고 들여다보고 해방하여 수복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왜 보이다 보이지 말다 해야 할까? 이는 <더 헬멧>이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더 헬멧>은 투명해지는 벽에 따라 벽 건너 일부분이 보인다. 벽은 여러 개의 격자로 나뉘어 콘솔 조작에 따라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이 생기거나 바뀐다. 이 투명한 일부는 벽 건너의 서사를 보이게 한다. 관객들은 스몰 룸에서는 스몰 룸의 시선으로, 빅 룸에서는 빅 룸의 시선으로 상대의 서사를 바라볼 수 있다. ‘룸 알레포’ 중 화이트 헬멧 카림이 환상을 보는 비눗방울 장면에서, 빅 룸의 관객은 창 건너 스몰 룸 속 아빠와 소마가 곰인형으로 축구하는 장면을 카림의 환상으로 비추어 보게 된다. ‘갇힌 자들’의 방 스몰 룸에서 소마가 신나서 환호하는 장면은 창 건너 ‘찾는 자들’의 방 빅 룸의 시각에서는 소마가 절박하게 손을 흔드는 장면으로 비춰진다. ‘룸 서울’ 스몰 룸에서는 빅 룸의 백골단 학생들의 서사가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기에 채찍과 뽀대 전경의 의중을 상세히 알 수 없다. 빅 룸에서는 상대적으로 잘 보이거나 들리지 않아 시고니의 변화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알기 어렵다. 선동렬의 마음은 더군다나 알 수 없다. 이는 시각의 차이다. ‘룸 알레포’ 빅 룸의 어른들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알지 못 하고, 스몰 룸 속 아이들의 시각은 빅 룸의 어른들의 시각과 다르다. ‘룸 서울’의 스몰 룸에서는 시고니가 말한 미움 때문일까, 백골단은 그저 하나의 큰 악의 덩어리로 보이기도 한다. 반면, 빅 룸에서는 배제된 여성 인물들의 서사와 성장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 관객은 평소 많은 연극에서 그러하듯, 전지전능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존재가 아니다. 드라마틱 아이러니를 꿰뚫어보던 관객의 절대 권력은 사라진다. 관객은 극중 인물이 그러하듯, 벽 건너의 이야기는 알지 못 한다. 그게 미시적으로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단위이든, 거시적으로 사건에 대한 관점의 단위이든, 관객이 보는 시야는 한정적이다. 사실 현실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시야의 관점에서, <더 헬멧>은 개인이 알아갈수록 보이는 이야기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격자 부분이 한꺼번에 투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한 블록 씩 투명해지듯, 사람도 알아갈수록 정보가 조각조각 이어지지 바로 모든 걸 투명하고 전능하게 알 수 있는 건 아닌 법이다. 소외된 타자들에 대해 알수록, 한 조각의 정보라도 더 모을수록 시야는 조금씩 더 트여간다. 내가 모르는 정보를 알게 될수록, 내가 아는 세상은 전과 달라진다. <더 헬멧>이 현실과 가까운 점은, 마지막에 걷어진 벽이 결국 다시 닫히는 점일지 모른다. 이 사건에 대해, 이 사람들에 대해 알기 전으로는 돌아가지는 못 할 거다. 하지만 벽 건너의 모든 걸 내가 안다고, 혹은 알았다고 말하는 것 역시 기만이다. 벽은 결국 다시 닫힌다. 다만 희망적인 것은 벽 건너에 대해 이미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듣는다, 반복하여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보자. 무엇이 들리고 무엇이 겹치는가? 왜 들려야 하는가? 왜 반복되어야 하는가? 

    <더 헬멧>의 공간 속에서 소리는 벽 건너로 공명한다. 벽을 사이에 둔 건너편 방의 소리는 겹쳐 들리기도 하고, 웅웅거리며 잘 들리지 않기도 하며, 특정 대사는 증폭되어 더 잘 들리기도 한다. 마치 미디어가 의도적으로 가리고 있거나 혹은 개인의 무관심이 무의식적으로 가리고 있는 서사가 벽 너머에서 숨 쉬고 있는 듯하다. 벽 건너에서 그저 흘러가는 소리들은 미디어나 소식으로 들려오는 산발적인 정보들과 닮아있다. 여러 상황 속의 목소리들처럼 겹쳐 다양한 관점의 이야기가 한꺼번에 전달되기도 하고, 무언가에 가려 잘 안 들리기도 하며, 몇몇 정보는 미디어나 군중이 뒤떠들어대며 더욱 부풀리기도 한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비슷하거나 같은 대사들이 겹치며 반복된다. 지이선 작가의 극에서는 종종 같은 대사나 극적 행동이 반복되는데, 그 때마다 그 의미는 달라지거나 심화된다. 마치 뮤지컬에서의 리프라이즈 넘버와 같은 역할이다. 공연을 스몰 룸과 빅 룸으로 나눠 진행하면서 반복되는 대사가 동시에 다른 울림을 주고, 반복되면서 감정을 쌓아올린다. ‘룸 서울’에서는 두 인물이 영화 <에일리언>에 대해 서로 다른 코멘트를 남긴다. (여성인물의 서사에 더 자세히 접근할 수 있는 스몰 룸에서만 두 음향이 겹쳐들린다.) 빅 룸의 프랭크는 그가 품고 있는 미소지니를 투영하여 ‘못생긴 여자가 외계인과 말도 안 되게 잘 싸우는 진짜 쓰레기’ 영화로 평하는 반면, 스몰 룸의 시고니는 그녀의 영웅이 등장하는 ‘진짜 최고인’ 영화라 열띠게 평한다. 두 인물의 코멘터리는 중첩되며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룸 알레포’의 작은 쪽방에서 울리는 아이의 환호성소리는 반대편 큰 방에서는 잔해 속에 파묻힌 아이의 구조요청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다. <더 헬멧>에서는 벽을 사이에 두고 정보량이 제한되어 있다가 시각적으로도 그리고 청각적으로도 점점 스펙트럼이 넓어진다. 

    그러다 보니 알기 전과 후, 반복되는 대사에 대한 감정이 사뭇 달라지기도 한다. 그 변화 자체가 이 극에서는 중요한 지점일지 모른다. 알기 전과 알고 난 후, 그 감정의 변화가 바로 타자가 지워지지 않게 하기 위한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클라이본 파크>의 백인 남성 극작가 브루스 노리스는 한 인터뷰에서 이와 같은 뉘앙스로 말하였다. “어차피 사람들 [소수자 관련] 극 보고 슬프다 눈물 찔끔 짜고 나와서 스테이크 썰러 가요. 자기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전 백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흑인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보다는요.” 이 답은 어찌 보면 한 면만을 제공하는 답이다. 기억의 아카이브로서의 연극은 타자의 슬픔과 고통을 저장한다. 스테이크를 썰러 간다고 해서 기억 속에 남은 알레포의 참극이나 서울 민주화운동의 아픔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어떤 정보를 알기 전과 안 후의 사람은 다른 기억이 새겨진 아카이브를 지닌다. 그래서 그 기억의 파편을 인식해 달라 말하며 당장 급하게 발을 구르는 사람도 많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차이는 크다. <더 헬멧>의 반복적 대사, 음향과 시퀀스는 이 차이를 상기시킨다. 떡볶이 선배가 문을 열고 나갈 때 외치는 대사와 ‘마이 웨이’ 노래를 들으며 이 서사를 접한 관객들이 시고니가 문을 열고 나갈 때 외치는 대사와 ‘마이 웨이’ 노래를 듣는다. 시고니가 프랭크를 쓰러뜨리고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을 본 관객이 특정 대사와 ‘마이 웨이’를 다시 들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다를 수밖에 없다. 이미 기억에 아카이브에 새겨진 서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창작진은 프로그램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4개의 공연은 이어지거나 통일된 형식이 아니기 때문에, 4개 혹은 2개의 공연을 보아야 공연의 완결성을 갖는 것은 아니며, 이 중 어느 것을 먼저 보거나, 하나만 보아도 무방하다.” 사실이다. 하나만 보아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다만, 둘 혹은 넷을 함께 보았을 때의 시너지 효과를 놓치기에는 아깝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당일 종일을 해서 생생한 감정을 안고 가도 좋고, 이미 관람한 감정의 팔림세스트에 하나 덧입혀도 좋고. 극들이 서로 나누는 유기적인 이야기 간의 상호 교류를 꼼꼼히 살펴보기도 하고 귀를 기울여보는 건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이다.

 

 

 

나가며

우리에겐, 가장 어두운 시대에 조차 어떤 등불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창작진이 메인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한나 아렌트 인용문이다. 한길사에서 출판된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개정판 서문에 이러한 말이 있다. “...혁명은 특히 아렌트적인데, 그것은 사람들이 ‘협력하여 행위하기’ 시작할 때 어떻게 권력이 갑자기 생겨날 수 있는지를, 또 권력이 어떻게 강력한 정권에게서 예기치 않게 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63) 인간의 끔찍한 악행이 사고력의 결여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한 한나 아렌트야말로 어쩌면 <더 헬멧>을 해제하는데 적합한 이론가일지 모른다. 지 작가가 언급한 것처럼, 절대적인 악인뿐만 아니라 “나의 선량한 적” 역시 약자의 입장에서 사고하지 않고 ‘너무 당연하게’ 악행을 저지른다. 백골단의 ‘선량한’ 전경들처럼, 약자를 짓밟으며 어두운 시대를 조성한다. 조직적으로 ‘협력하고 행위’하여 떡볶이 선배를, 시고니 선배를, 시리아의 아이들을 짓이긴다. 다만, 화이트헬멧들은, 그리고 창작진들은 계속 흙을 파내고 그들을 캐내어 드러낸다. ‘협력하고 행위’하여 권력을 해체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몸부림치는 이들을 구해낸다. 그래서 <더 헬멧>을 보고, 다시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겐, 가장 어두운 시대에 조차 어떤 등불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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