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yun Gracia Shin

가무극 다윈영의 악의기원 (2018) 리뷰: 절제해낼 수 없는 기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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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무극 다윈영의 악의기원 (2018) 리뷰: 절제해낼 수 없는 기원

Gracia Shin 2019.09.14 03:25

이미지 출처: 서울예술단 블로그

 2018년 하반기, 서울예술단이 다시 한번 야심 찬 시도를 했다. 정혜진 예술감독 이래, <윤동주, 달을 쏘다.>, <잃어버린 얼굴 1895>, <푸른 눈 박연> 등 역사 인물 위주의 팩션극을 올린다는 인상이 주였던 서울예술단은 2015, 웹툰을 원작으로 한 <신과 함께_저승편>을 과감히 무대화하여 선택의 폭을 보여줬다. 그리고, 2018년 새로운 이사장 취임 후 서울예술단이 처음으로 선택한 극은 국내의 현대문학 작가, 박지리의 <다윈영의 악의기원>이었다. 한국을 배경으로 하지는 않되, 한국 문학 작가를 골라 서울예술단 가무극의 한국적임을 놓지 않고도 모험을 한 셈이다. 소재의 과감한 선택으로 현재의 서울예술단에 신선함을 가미하였다.
  
   <다윈영의 악의기원> 공연 소식을 듣고, 처음 박지리 작가의 <다윈 영의 악의 기원> 1회 독을 하였을 때 처음으로 든 감상은 시니컬함에 가까웠다. 외부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아 변이하고,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는 생명력 혹은 활기(活氣).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가 진화론을 모티프로 차용하였으리라 짐작은 해보나, 다른 의문점들이 맴돌았기에 그런 감상이 남지 않았을까 싶다. 삼대가 같은 전철을 밟는 것과 DNA 비유의 연관성. 이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악의 기원과 죄의식은 초역사적이라는 것인지. 만약 악의 기원과 죄의식이 DNA처럼 초역사적이고 인류 보편적이라면 이를 짚는 건 과연 어떤 의의가 있는지. 인간은 죄를 짓는다, 이 명제로 되돌아가고 또 되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해 보이고 허무하기까지 한 결론을 위해 이 두꺼운 책을 읽었나 싶은 것이다.
  
   다만, <박지리를 읽는 시간> 모임, 박지리 작가와 관련된 레퍼런스들, 그리고 서울예술단의 가무극 <다윈영의 악의기원> 이후, 드디어 퍼즐이 맞춰진 기분이다. ‘절제해낼 수 없는 기원’. 김지은 평론가가 표현한 공범의식이라는 핵심어와 가까운 것. 다윈이 극 중에서 말하듯, 인류 역사를 타고 올라가면 살인자가 아닌 이는 없다. 아버지를 미워했고, 그를 고발하려던 다윈은 자신도 오롯이 깨끗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의식 아래에는 DNA 혹은 기원이 있다. 
  
   이 기원이라는 단어를 내게 편한 다른 단어로 대체해보자면 ‘context’(맥락)이다. ‘라는 존재를 빚어내는 기원은 오롯이 나 홀로만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어떠한 맥락 혹은 기원에 따라 존재한다.  기원을 다윈이 처음에 하려 했듯, 아버지를 처벌하여 잘라낸다면 이야말로 깨끗하고 편한 선택지일지 모른다. 선을 남겨두고 악을 자른다. 질서를 남겨두고 위반을 삭제한다. 내 기준에서 옳지 않은 것, 절대적인 죄(e.g.살인)는 사회 밖으로 밀려나 마땅하다. 다만, 세상은 이처럼 이분법, 혹은 흑백 논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선과 악은 혼재되어 있고. 사랑과 미움 또한 붙어 있는 양면이다. 인류에서 이러한 기원, 혹은 맥락을 절제해낸다면, 현재의 인류는 홀로 설 수 없다.
  
   들뢰즈는 이분법 기계로 대표되는 사회의 구조(맥락/다윈영에서의 기원)를 혐오하나, 그 구조는 완전히 부술 수 없기에 이를 내부에서 해체하고 변이시키고 확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다윈영의 악의기원>은 그 기원을 돌아보라 한다. 선과 악을 미워하고 사랑하는, 그 혼재함을 끌어안으라 한다. 모든 아버지의 죄, 할아버지의 죄, 인간의 원죄 3 mg로 대표되는 그 기원을 척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랑은 대상을 오롯이 보고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이기에. 내 존재를 얽어 형성하는 역사를 끌어안는 과정은 성장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다. 내가 그대로 믿고 있던 구조를 해체하되, 맥락을 끌어안아 살피고 나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내가 그 변이의 전환점, 바로 그 지점이 되어 나의 세계를 부수고 확장하는 것.
  
    이는 구조로 단순히 다시 편입되는 것과는 다른 과정이다. 구조의 해체가 선행되어야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모조리 찢어발겨, 인간의 악의 기원 그 내밀한 곳까지 파고들어야만 나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아이로서의 나를 해체하고 죽여야 어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물 다윈 영은 구조 속으로 재편입되는 기존의 보편적 성장 서사의 안티테제이다. 그는 레오를 살해하고 루미와 이별하고 프라임스쿨, 바로 그 구조의 정점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 다만, 그는 열여섯 살의 어린 다윈 영이 아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의 역사의 원죄까지 끌어안을 준비가 된 다윈이다.
  
   반면에 니스는 그 기원을 파헤치지 못한 채, 두 눈을 반쯤 뜬 자이다. 열여섯, 구미권에서는 성대한 축하 파티를 열며 하나의 큰 성장의 계단을 넘는 기점이다. 다윈, 루미, 레오를 통해 강조되는 숫자 열여섯. 가무극에서는 니스의 열여섯 그 순간이 배우의 인물 설정으로 표현된다. 아이로서의 나를 해체하고 죽이지 못한, 죽고 싶어도 죽지 못 하는 니스 영은 껍데기만 자란 채 속 알맹이는 아직 자라지 못한다. 니스 영은 속을 뒤집어놓는 트라우마를 말 그대로 구역질하며 그의 내면을 밖으로 토해낸다. 동시에, 연출은 니스와 다윈의 거울 같은 면을 강조한다. 거울에 비친 상은 닮았지만, 거꾸로 비쳐 완전히 같지는 않다. 비슷한 처지의 다윈과 니스는 같지만 다른 선택을 하고, 비슷해보이지만 다른 감정선을 보인다. 다윈은 열여섯이라는 시간의 관문을 통과하지만, 니스는 열여섯 거울 속에 후드를 쓴 채 머무른다. 이 둘을 데칼코마니처럼 비춰 위화감을 조성한다. 하지만 그 위화감을 타고 올라가면, 그들의 원죄 3 mg, 악의 기원 그 계보는 존재한다.
  
   니스와 다윈이 아버지의 악의 계보를 쥐고 간다면, 가무극에서 새로운 색채를 띠는 루미의 존재는 다윈의 안티테제와는 다른 불을 밝힌다. 이희준 극작가가 인터뷰에서 예고하였듯, 가무극 <다윈영의 악의기원>은 각색을 통해 루미에게 보다 힘을 실어준다. 리틀 제이, 제이의 후계자로서의 안경을 벗고 루미만의 시선에서 진실을 파헤치겠다는 선전포고. 홀로 오롯이 책임지겠다는 선언. 구조를 해체하되 그 구조의 계보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다윈과는 달리, 루미는 루미만의 새로운 시선으로 아버지의 역사를 파헤치려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그 원죄를 발칙하게 고발하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루미는 가능성을 품은 아기호랑이이자 진실을 추구하는 전사이다. 중세 수도원의 역사 속, 남성 계보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헤게모니 속에서 (<다윈 영>에 어머니의 언어는 들리지 않는다) 대대로 내려온 원죄를 해체하고 고발할 자는 이제 안경을 벗은 루미이기에.
  
   레오의 장례식에서 인물들은 각자 비석 앞에 서서 인류의 보편적 부채, 생과 죽음의 무게를 진다. “인간의 기원부터 시작된 종소리는 아직도 울리고 있다.” 진실의 무게를 감당 못 해 두 눈을 절반만 뜬 채로 살아가는 인간들도, 한 소년과 자신의 소년 시절을 찢어발기고 변이한 인간도, 악의 기원을 감히 파헤치려 하는 당찬 한 인간도 모두 생과 죽음과 진화를 등에 진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 앞에 던져진 삶에 꾸물꾸물 몸을 맞추어 변이하는 진화. 그 진화를 거슬러 올라가면 만나는 악의 기원.

 

 

"새벽이 오면

나는 나의 세계와 결별한다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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