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yun Gracia Shin

가무극 잃어버린얼굴1895 (2013) +뮤지컬 곤투모로우 (2016) 대담: 무교적 특성에 집중하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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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무극 잃어버린얼굴1895 (2013) +뮤지컬 곤투모로우 (2016) 대담: 무교적 특성에 집중하여

Gracia Shin 2019.09.14 10:34

<월간 이선좌> 10월호: 서울예술단 30주년 특집편에 수록된 합동리뷰

 

+) 리뷰에서 언급하는 모든 역사인물들과 그 해석은 역사 속의 인물들이 아닌 극중 인물을 지칭/해석함

+) 참고한 작품:

<잃어버린 얼굴 1895> 2013, 2015년 프로덕션 (휘 제외 원캐스트: 휘는 세 배우 모두 관람.) /

<곤 투모로우> 2016년 프로덕션 (임병근, 이율, 박영수 배우 회차 관람.)

 

 

가무극 잃어버린얼굴1895 (서울예술단)

 

들어가며

 

무명: 서예단 하면 역시 <잃어버린 얼굴 1895>(이하 잃얼)!

 

휘: 그렇지. 이게 바로 그 서울예술단(이하 서예단) 재부흥기를 자리매김해준 작품 아니겠습니까. 2013년 서예단은 윤동주로 신호탄을 올려서 잃얼로 마니아층을 휩쓸었으니까. 게다가 나는 특히 잃얼과 <곤 투모로우>(이하 곤투)를 같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두 작품의 연출가인 이지나 연출과 서예단 간에는 긴밀한 인연이 있어서야. 그래서 서예단 30주년 기념 원고에 이지나 연출을 뺄 수는 없지. 잃얼도 잃얼이지만 서예단에게 기념할 만한 1회 더뮤지컬어워즈 조명음향상/안무상을 안겨준 작품이자 서예단의 대표 레퍼토리, 서예단이기에 할 수 있는 가장 특징적인 이미지 극인 <바람의 나라 -무휼편->의 연출 역시 이지나 연출이잖아. 잃얼 역시 서예단의 특징을 잘 살린 극이고.

 

무명: 그러네. 그리고 서예단이었기에 잃얼이 잘 살아났다고도 생각해서. 아무래도 난 무교에 관심이 많으니까 자연스레 어떤 연극이든 무교적 속성이 있으면 집중해서 보기 마련인데... 잃얼은 특히 무교적 의례가 중점적으로 나온단 말이야. 실제 굿하는 장면도 있고. 근데 여기서 무용이 어색하다면 집중력이 훅 떨어진단 말이지. 왜냐면 자못 만신(무당)이라면 연행능력(춤, 노래 등 미학적으로도 굿 관객을 만족하게 해줘야)도 갖춰야 하거든. 단순히 신령님과 통한다 해서 다 되는 게 아니고.. 서예단이라서 무용을 그렇게 예쁘게, 어색하지 않게 잘 살릴 수 있었던 거겠지.

 

휘: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무교라고 하잖아. 내가 전에 배운 바로는 무속신앙은 종교의 삼대 특징을 따르지 않기에 종교라고 인정하기 어렵다던데, 이 단어로 고정해서 써도 되려나?

 

무명: 흠, 맞아. 무교로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 통일된 경전이 없으니까. 뭐 경전 말고도 무교로 보지 않는 여러 가지 입장 많지~ 결국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무엇으로 보는지, 관점의 차이인데. 나는 무교가 죽음과 삶, 초월적 존재에 대한 성찰을 다루고, 궁극적으로 망자와 산 자를 위로하기 때문에 무”교(敎)”라고 봐. 무속에서 그치기보단. 뭐 여기에 대해서 추가로 얘기하자면 “종교”라는 단어가 서구사회의 종교 유입 이후 쓰인 단어라 무”교”도 맞지 않다며 “무”라고만 부르시는 학자분도 계시고.

 

 

가무극 잃어버린얼굴1895 (서울예술단)

 

 

곤투와 잃얼의 연결점과 작품의 무교적 특성

 

무명: 망자와 대면시켜준 것

 

휘: 어떤 느낌으로?

 

무명: 망자가 직접 자신의 한을 말할 장이 만들어진 거니까… 잃얼의 경우엔 망자들이 어떠한 연유에서 한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상황을 연극으로 현시해준 거. 망자들은: “내가 이런 사유로 한이 맺혀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내 원(願)은 이것이다.” 후손들은: “아이고 그러셨소. 흑흑. 고생이 참 많으셨겠소… 그 원 이루도록 노력해볼 테니 부디 편안히 잘 가시오.” 일종의 위로? 곤투는 마지막에 김옥균의 혼이 말할 독무대를 꾸민 것.

 

휘: 으음, 그렇군. 그 중 특히 잃얼은 명성황후의 해원굿 같은 작품이라 볼 수 있잖아.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명성황후의 여러 가지 얼굴들을 조명해서 보여줌으로써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준다는 의미? 우리가 늘 생각하고 있던 우상화된 명성황후라든지, “여우”라든지. 한 가지 시선으로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인간 민자영, 명성황후로서의 삶, 죽은 뒤의 모습 등 여러 시선으로 본 명성황후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극. 어떻게 보면 명성황후의 측면에서 봤을 때 “저건 오해들이야!”라고 할 법한 것들을 풀어내잖아.

 

무명: “저건 오해들이야!” 할 법한 거? 응, 맞아. “이제 당신의 한을 비로소 이해하였소. 모든 게 당신 탓으로 돌려지셨으니 얼마나 억울하셨소. 그러나 이제 진정한 당신 기리는 이 여기 있으니 마음 놓으시고 이젠 편안히 잘 가시오”라고 비는 거랄까 (뭐, 명성황후에게 피해 받은 백성 입장에선 명성황후 탓이 없다고라? 할 판이지만! 그래서 극 중에서 백성의 처지를 대변해주는 장면도 있으니 나중에 언급할게.) 음, 위로의 측면에서 조금만 더 얘기하자면, 무교에서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것은, 내 삶에 대한 목격자가 있고, 죽을 때 편안히 목격자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고… 내 죽음 이후에도 고이 잘 모셔주고, 기억해주는 자가 있는 거. 나의 삶을 현시해줄 이가 있다면 참 흐뭇한 거. 어떤 동해안 굿 중에 가족들이 돌아가신 할아버지 부르며 천으로 둘둘 말아 인간 모양으로 만들거든. 그 천 뭉치를 가족들끼리 빙 둘러싸고 앉아 살아생전 모습 추억하면서 울고 웃어. 잃얼에도 이런 장면 있는데. 기억나? 진령군이 벌인 굿판에서 명성황후가 자기 치마폭 끌어 모아서 꽉 끌어안잖아. 흐느끼면서. 그 치맛자락, 자기 애기였을 거여. 잃얼은 뭐랄까, 천 인형을 넘어서 아예 극 자체로 올린 거. 그렇다면 역사 인물을 다루는 극들도 현시로 본다면 폭넓게는 굿이랑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 단순히 오락성이 아니라 추모의 의미도 들어가 있다면 말이지.

 

명성황후: 사진을 박으면 그 사람 혼도 함께 박힙니까?

휘: 오늘은 해가 기울었으니 내일 다시 오시겠습니까? 사진을 박으시려면 진시에서 사시 사이에 오세요.

(중략)

명성황후: 이 많은 사진들 틈에 왜 왕비의 사진은 없는 것입니까? 혹시 왕비의 모진이 있다면 볼 수 있을까요?

 (<잃어버린 얼굴 1895> 2013년 프로덕션 中)

 

그런데 그 중에서도 잃얼은 정말 굿의 형태를 띠었다고 생각하는 게, 혼이 제 가족들이 만신에게 찾아오기 전에 만신에게 행차하여 언질을 주고 (이 과정은 어떤 굿엔 없기도 함), 만신은 가족이 오면 굿판을 벌여 정식으로 혼을 초대하고 혼의 한을 듣고 풀어주고 혼이 가시는 길까지 닦는 게 아주 완벽하게 다 들어가 있어. 사진 박고 싶어 하는 명성황후가 휘에게 나타나지 (위 대사). 시간상 그 다음에 민영익이 찾아오고 그 다음에 명성황후의 국상 날을 휘가 기억해. 그 때 휘의 기억 속 인물들이 명성황후의 예칙문을 읊는데 그게 일종의 굿의 시작을 알리는 게 아닌가 싶어. 그리고 첫 국상 장면에 흰 천에 글들이 뜨는데 심상치 않다? 인터미션 이후에도 그 천 또 나와. 쉬는 시간 끝! 다시 굿 시작한다 알리는 건가? 원래 굿에서 흰 천에 불러올 인물의 신상정보를 쫙 써서 걸어 놓기도 하는데 그런 거겠지? 언제 태어나시고 언제 가셨던 누구누구(이름)시여 잘 찾아오시라고.

 

휘: 휘 대사가 딱 그래. 당시 상황, 그러니까 어떻게 죽었고 분위기는 어땠으며 상황은 이랬다 등을 휘가 줄줄 읊지. 휘가 무당이니까. 휘가 자기의 기억을 되부르는 순간, 고종도, 대원군도, 다른 인물들도 다 불려오거든.

 

1897년, 때는 초겨울이었습니다. 오전 11시, 맑게 개었던 하늘이 오후 2시가 되자 놀랍게도 뇌성과 함께 진눈깨비가 몰아쳤고요. 일 천 삼 백 명이나 되는 군중들이 금곡에 있는 능까지 따라 올라갔습니다. 예칙문이 울려 퍼졌습니다. 명성황후 마마의 국상 날이었죠. 그 날, 손님처럼, 왕비의 모진을 찾는 어느 여인이 이곳을 찾아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얼굴 1895> 2013년 프로덕션 中)

 

그리고 국상은 시작돼.

 

무명: 아 참, 민영익이 찾아오기 전에 명성황후가 언질을 준다는 장면 있잖아. 언질을 준다는 게 “꼭 내 친지가 찾아올 거다,” 직접 얘기해준다는 건 아니고 “뭔가 일이 있을 거다,” 하고 암시한다는 거임. 제주 4.3사건에 휘말려 돌아간 부부가 어떤 제주도 만신의 꿈에 나타나서 피를 철철 흘리며 고요히 자신을 쳐다보더래. 꿈에서 깬 만신이 “어이구, 누군가 찾아오려나 보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제주 4.3사건으로 부모님을 잃은 분이 몸의 고통을 호소하며 찾아 오셨더란 얘기. 부모님 잘 가시라 굿을 치러줬더니 그 고통이 어느 정도 가셨더라. (잠깐! 여기서 부모님이 청년을 아프게 한 건 괴롭히려는 게 아니고 이런 억울한 일이 있었음을 기억해달라.. 나를 기억해달라 이런 의미)

근데 생각해보니 국상 장면이 흥미로운 게 고종 혹은 그 시대 입장에서는 장례식이잖아? 혼을 보내는 장면이지만 민영익과 휘에겐, 혹은 관객에겐, 불러오는 장면이야. 보내는 것과 불러오는 게 동시에 이루어지는 장면이네. 아 그리고 처음 시작과 끝은 명성황후-만신(휘)-민영익 관계지만, 잃얼엔 만신과 굿을 청하는 이와 굿의 초대를 받으시는 이의 관계가 이거 말고도 꽤 다양하게 나와.

 

휘: 맞아, 잃얼 진짜 너무 복잡해. 액자식 구조도 엄청 중첩되어 있고. 다양한 시선들도 그렇고.

 

무명: 첫 번째 관계는 알다시피 명성황후-만신(휘)-민영익. 민영익이랑 명성황후가 처음에 사진을 찾는다면서 나오잖아. 두 사람의 소원을 받들어서 맨 마지막 장면에 휘가 명성황후 혼의 사진을 찍지. 두 번째, 명성황후-만신(휘)-관객, 휘가 관객에게 명성황후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민영익이 명성황후에 대해 전해준 이야기와 민영익이 모를, 명성황후 본인의 진술을 합친 이야기 말이야. 그리고 관객은 명성황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고. 아마 추모하게 되는 마음이 생기시는 관객 분도 계실지 모르겠는데. 휘가 그 사진을 태움으로써 그 마음을 명성황후에게 같이 전해줘. 세 번째, 명성황후의 아기와 어머니-만신(진령군)-명성황후. 네 번째, 백성-만신(휘)-관객. 조선 왕실 및 일제 권력에 피해를 받은 백성들의 억울한 심정을 휘가 전해주고 우리는 추모하고, 그 감정을 아마 명성황후 사진을 태울 때 휘가 같이 전해주고. (사진을 태울 때 명성황후만 보내는 게 아니고 같은 내려온 백성들도 다 같이 올려주는 거거든. 소지는 다 올려 보내는 거!)

 

휘: 그러면 여러 명이 내려온다고? 나 이해가 안 가. 신이 내리는 건 보통 장군신이나 이렇게 한 명만 데려오는 거 아냐?

 

무명: 아냐. 다 따라오셔. 카리스마틱한 혼님을 모시면 포탈이 열려서 억울하게 죽은 다른 원혼님 네도, 잡귀들도(원혼과 잡귀는 무교에서 구분됨. 산 사람에게 잊혀 갈수록 잡귀에 가까워진다) 같이 따라 들어오는데. 명성황후도 마찬가지지. 연관된 백성들이나 인물들이 오겠지. 곤투에서는 김옥균이 오는데 다른 인물들도 같이 오게 된 거고. 물론 곤투는 굿 포맷이 아니니까 여기에 포함 안 되려나. 그렇게 같이 오는 원혼과 잡귀가 있으니까 무교에는 걸립당이라는 곳이 따로 있을 정도니까. “같이 오신 원혼님네들~이 굿 주인공 제사상 음식 같이는 드시되 이 제사상에 함부로는 손대지는 마세요. 드실 자리 따로 마련해드릴게요~”의 의미로 따로 마련해드린 공간이 걸립당인데.. (물론 걸립당엔 이 외에도 여러 의미가 있어) 쫓아내기는커녕 오히려 모든 분들 한 분 한 분 다 챙겨드리는 거랄까?

여하튼 많은 분들이 내려오시기 때문에 명성황후의 입장에서만 이 극이 진행되지 않는 걸 거야. 다른 분들, 예컨대 백성의 입장에서도 사건을 조명하잖아. 백성 입장에선 명성황후는 마을을 연못으로 매장시킨 매정하신 분이고.. 잃얼은 권력에 당해온 백성들의 말도 전해주는.. 민초도 위로하는 극…

명성황후는 흔히 아예 미화되거나 아예 악한 이미지로 비추어지는 경우가 많지. 내가 이 극이 마음에 들었던 건 평소 거론하기 조심스러울 수 있는 민감한 역사가 한 쪽으로만 치우쳐서 해설되지 않는다는 점. 명성황후의 입장에서, 백성의 입장에서 다양한 시선으로 풀어내진다는 점. 여러 원혼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듯이. 마치 휘 만신이 mc가 되어서 복닥복닥 같이 모이신 원혼님네 한 분 한 분마다 마이크 돌리는 느낌.

 

휘: 으음, 그러네. 나는 잃얼이라는 극 자체를 우리나라의 망자 천도굿의 일종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어. 아까 말했지만, 해원굿 말이야. 위로 올려 보내는 것. 명성황후의 원도 풀지만 동시에 우리나라도 깊은 역사적 트라우마가 있잖아. 일국의 황후가 그렇게 무참히 살해당했다는 것, 식민지배의 아픔은 아직까지도 해원이 되지 않았지. 나는 그래서 잃얼이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것 자체로 “아, 이런 아픔이 있구나”라는 걸 남겨준다고 생각해. 나는 망자 천도굿이 다른 나라의 굿에 비해 남아있는 이들의 위로와 아픔 해소를 더 위주로 한다고 논문에서 읽었거든. 그래서 나는 잃얼의 목표가 명성황후의 원을 풀어주는 것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극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남은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것도 있다고 생각해.

 

무명: 맞아, 동의해. 여기에 관련해선 김성례 교수님의 논문 <제주 무속: 폭력의 역사적 담론> 읽어보면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될 거라 생각해. 아픈 역사를 어떻게 굿으로 치유하는지 잘 설명되어 있는 논문이거든.

 

휘: 그런데 그 중에서 잃얼의 경우 사건의 재현을 망자들이 해주는 점이 독특한 것 같아

 

무명: 맞아, 처음에 내가 언급했던 거지. 망자들이 어떠한 연유에서 한을 가지게 되었는지 (실제 굿판에선 망자가 만신 몸에 빙의해서, 아님 만신이 친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망자인 척) 특정 사건을 현시하는 거. 실제 굿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거야

 

휘: 응, 그게 전체 콘셉트기도 하고. 휘는 망자들을 볼 수 있는 신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약간의 묘한 예지력도 있고. 극 중에서도 휘는 명성황후의 혼을 보았고, 큰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자기 어머니한테 무엇이 느껴진다며, “무슨 일이 생기려나 봐요!”하고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말했었잖아. 휘가 명성황후의 국상 날을 돌이켜보며 고종이 등장, 전체 이야기가 플래시백되고, 혼들은 불려 나오지. 이 국장 장면은 일종의 신청울림 그리고 굿의 시작 장면으로도 볼 수 있어 신청울림은 일정한 소리를 반복적으로 울려 굿의 시작을 알리지. 그 소리로 악귀를 쫓고 원하는 혼을 부르고. 평범한 장소인 마당은 굿의 영역이 돼. 잃얼의 첫 넘버를 생각해보면 딴, 딴, 딴딴딴따-, 딴, 딴 딴딴딴따-하고 일정한 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리면서 시작되잖아. 그 소리로 평범하던 무대도 혼들이 뛰어노는 굿터가 돼. 죽은 혼들이 뒤에서부터 웅장하게 밀려나와 무대를 가득 채우지. 무당인 휘가 그 굿판의 한가운데로 걸어가면서, 과거의 혼들은 휘를 빙글빙글 에워싸고, 휘도 그 장면에서 회상 속 휘가 되어 과거의 시점으로 이야기는 진행돼. 휘는 꽤나 메타적이지. 극 안에도 있고 바깥에도 있어. 그리고 본인이 극 안에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아. 그리고 마지막에도 소지를 태우는 의미와 상통하게 휘가 명성황후의 사진을 태워. 선화를 비롯한 궁녀들과 같이 명성황후 주변에 있던 다른 원혼들도 같이 해원되어 저승으로, 서천꽃밭으로 떠나지.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굿의 형식과 같더라고. 이게 내가 저번에 페이퍼에 썼던 내용의 일부.

 

무명: 뛰어논다고?(웃음) 한이 맺히셔서 제 이야기를 전하러 오신 분들께 뛰어논다니 경을 칠 일일세! 아니 물론 슬픈 일을 슬픈 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 뛰어노시며 웃음을 일부로 내시기도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여기는 아니고. 그러고 보니 이게 바로 잃얼에는 없는 굿의 요소인데. 망자, 산 자끼리의 실없는 농담이나, 만신끼리의 촌극으로 인한 웃음, 혹은 망자가 산 자의 복을 빌어주어 비극을 치유하는 방식은 잃얼은 택하지 않는 거 같아. 그것보단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이 산 삶을 재조명하겠단 느낌?

그에 비해 곤투는 망자가 직접 나와서 자기 한을 이야기해주는 장면은 있지만 굿의 형식이라고 보기엔 애매하고, 무교적 특성은 띨 뻔.. 했나? 망자가 직접 나와서 자신의 한을 이야기 하는 장면이 나오니까. 어쨌거나 잃얼을 굿의 일종으로 인정하는 이유는 망자와 산 자를 이어줄 인물이 나오고, 망자의 한을 재현함으로써 망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고, 한풀이 후 영을 배웅하는 것까지 잘 마무리하기 때문이야. 초대하는 것부터 보내드리는 것까지 잃얼은 다 하고 있어. 정확히 모든 굿의 절차를 따른다고 하긴 그렇고 굿의 포맷을 갖추고 있다곤 말할 수 있지. 근데 곤투는 한을 풀어주는 과정이 없어. 그리고 망자와 산 자를 이어주는 매개자도 없어.

 

휘: 흠, 그건 그래, 확실히. 그런데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게,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곤투 전체를 굿으로 보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야. 다만 무교적 요소들이 묻어난다는 거지. 잃얼은 형식적으로 굿과 많이 닮아있었던 거고 딱딱 맞물렸던 거야. 그 특징들로 잃얼과 곤투의 연관성이 더 뚜렷이 보이는 거 아닐까 싶어.

 

무명: 그니까. 잃얼에서 하도 무교적 특성이 잘 표현됐다보니 곤투가 잃얼 페어극이라니까 나도 모르게 눈에 불을 켜고 무교적 속성을 찾으려고 해 자꾸.

 

 

뮤지컬 곤투모로우 (아시아브릿지컨텐츠)

 

조선판 세상의 끝 곤투, 잃얼과의 차이

 

휘: 곤투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뭔가 생각해보면, 앞에서 그렇게 줄줄 길게 이야기했던 걸 2막 끝 김옥균 솔로 후반부로 30초 만에 끝내버리는 그 부분이 아닌가 싶어. 분위기가 바뀌고, 곡조가 바뀌면서 김옥균은 노래하잖아.

 

내 뼈와 살 내 뼈와 내 핏물

흘리리라

흘러서 비 되어 살아가리

그곳에서 난 다시, 다시--

(<곤 투모로우> 2016년 프로덕션 中)

 

내 피와 살점이 다 떨어져서 남아 꽃으로 다시 피리라. 그렇기에 나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나 대신 혁명할 이는 얼마든지 있고, 그 혁명은 계속 이어지리라, 라는 부분.

내가 무명님이랑 곤투를 보고 동의한 건 홍종우가 연사 당해 죽는 장면에서 끝났다면 극적으론 웅장하고 깔끔했을 거라는 거였어. 하지만 와다가 나오고, 김옥균의 영이 다시 나타나잖아. 물개 이야기. 어미가 살해당해도 새끼들이 와서 젖을 빤다. 어미는 김옥균 본인이고 새끼들은 그의 유지를 이어갈 자들이지. 나의 시체에서 새로운 힘을 얻어 계속 이어가리라. 이 이야기는 다른 비유로도, 아니면 직접적으로도 굉장히 많이 반복되거든. 그 뒤 바로 김옥균 솔로에서도 그렇고.

 

무명: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대사가 있었네.

 

휘: 그래서 잃얼과 곤투는 좀 결이 다른 거 같아. 이지나 연출의 트위터에 그런 말이 있어. "선이 곱고 스산한 잃얼. 선이 굵고 비장한 곤투." 잃얼은 스산한 가운데 영을 곱게 보내주는 느낌이라면, 곤투는 비장하게 "나는 여기에 있었어, 나는 남아있고 이런 것을 할 거야" 라고 선언하는 느낌이 강하지. 하지만 비슷한 제재를 적극적으로 쓰고 있는 작품이기에 그 둘의 퍼즐을 함께 맞췄을 때 더 큰 그림이 나오는 것은 부정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

 

무명: 맞아, 공통점으로 적어도 망자가 자기 이야기를 하러 직접 나온다는 건 확실한 것 같아. 다만 하나는 치유의 느낌이라면 하나는 다짐의 느낌이지.

 

휘: 잃얼은 묶여있는 매듭을 풀어 위로 올려 보냈다면, 곤투는 "보내면 안 돼"이어야 하는 거지. 곤투는 세대가 바뀌더라도 계속 이어간다는 걸 보여줘야 하는 거야. 김옥균이 죽어도 홍종우와 그들의 동료가 있고 그들이 죽어도 그를 이을 누군가가 있고. 투쟁은 이어질 것이라는 것.

 

무명: 아 그래서 곤투에선 한풀이가 없을 수밖에 없겠네. “한풀이 해드릴게요.” 이래도 극 중 김옥균이라면 거부할 듯(웃음). 물론 실제 역사적 인물 김옥균은 어떤 반응을 보여줄진 모르지만

 

휘: 그런데 곤투가 이걸 보여주는 게 어떻게 보면 참 아이러니한 게, 곤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대사가 “세상의 끝에서”라는 대사거든

 

무명: 아이러니? “투쟁은 이어질 것이다”와 “세상의 끝”이 모순된다는 거야?

 

휘: 원래로 따지면 세상이 끝나는데 어떻게 뭐가 이어질 수 있겠어 (웃음). 종말이잖아, 디 엔드. 하지만 이 대사는 주요인물 세 명인 김옥균, 홍종우, 고종이 다 반복해서 말해. 이렇게 반복해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게, “세상의 끝에서”라는 개념이 참 중요하기 때문이야. 그 시대상이랑 떼려야 뗄 수 없는 개념이지. <노트르담 드 파리>의 넘버 "대성당들의 시대"에서도, 서양의 많은 문학에서도 이야기하는 세상의 종말이라는 개념. Fin de siècle. 이제 새천년이 온다는 건데.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무언가 새로운 것이 오고 있다는 불안감. 세상이 망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 이는 곤투에서도 마찬가지야. 우리나라에서 조선이 끝나가는 거거든. 새로운 대한제국은 세웠더라도 끝이 다가오는 게 보여. 앞으로 무엇이 있을지는 몰라. 그 불안감이 있어. 이 곤투의 인물들은 세상의 끝 그 와중에도 자신의 존재들을 이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잃얼처럼 풀어서 보내줄 수가 없어. 그러면 끝나버리는 거거든. 잃얼은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 곤투는 내가 이어가야 한다는 것. 김옥균은 죽어도 죽은 게 아냐.

 

무명: 김옥균은 죽어도 죽은 게 아니야? 뭔 소리여, 그게.

 

휘: 김옥균의 피와 살덩어리들이 남아서 거기서 꽃이 피고, 또 핀다는 가사가 있어. 그 꽃 속에 남아있는 건 김옥균의 이상이야. 그래서 도라지가 중요하지. 도라지 씬에서 영상이 그로테스크하다는 이야기가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난 그 영상이 나름 잘 들어맞는다고 봐. 김옥균의 이상을 이야기하면서 도라지꽃 한 송이가 피고 증식하듯 그에 이어서 두 송이가 피고 세 송이가 피고. 김옥균이 이야기하면 할수록 넝쿨처럼 피어나서 결국 무대 전체를 뒤덮잖아.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홍종우는 김옥균의 이상에 사로잡히고, 무대 위 둘의 위치는 바뀌어. 개인적으로는 이 블록킹이 나름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 김옥균이 불러낸 민초들이 홍종우를 에워싸고, 홍종우는 어느샌가 김옥균의 자리로 이동하지. 그리고 김옥균은 다시금 그가 사랑하는 민초들에게 둘러싸여 그가 사랑하고 만들고 싶어 했던 세상을 봐. 그 이상 속 세상에서 너무나 행복해하는 김옥균의 모습을 홍종우가 김옥균의 자리였던 뒤편 무대 중앙에서 바라보고. 이렇게 김옥균의 이상은 홍종우에게로 이어지지.

 

김옥균: 내가 아니면 어떤가. 또 자네가 아니면 어떤가. 우린 그곳에 갈 수 있을 거네.

나를 죽여 너는 살거라! 나 또한 죽어 다시 살겠다. 나를, 나를 꼭 그곳에 데려가다오.

 

이 세상 끝에 서면 순간이 있지

때를 기다려 버릴 순간

버려서 얻는 삶

또 새롭게 시작된 삶

머물다 떠나는 부질없는 꿈이라도 그게 인생

죽어서 다시 사는 인생

누가 나를 기억해줄까

그 남겨진 피눈물 끝없는 추락

(<곤 투모로우> 2016년 프로덕션 中)

 

무명: 그러면 곤투랑 잃얼을 관통하는 건 휘님은 뭐라고 생각해?

 

휘: 역사의 트라우마. 한 쪽은 그걸 치유하는 방식으로 간 거고, 한 쪽은 그걸 싸워나가려는 방식으로 간 거고.

 

무명: 그럼 이 두 작품이 딱히 특이하다고 볼 수는 없지 않아? 역사의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극은 많잖아.

 

휘: 나도 딱히 특이하다고 보지는 않아.

 

무명: 난 “왜 굳이 망자가 나왔어야 했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 캐릭터가 죽으면 그걸로 그 캐릭터는 퇴장하고 남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플롯도 많은데 굳이 여기는 망자가 직접 초대되었잖아. 난 수많은 작품 중에서 이 두 작품이 특이하다고 봤던 건, 망자에게 자기의 속마음을 직접 자신이 내보일 기회를 준 것 때문이야. 죽은 것에서 끝내버리는 게 아니라.

 

휘: 잃얼은 죽은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고정된 시각에서 하곤 하니 내 진짜 얼굴을 잃어버렸다는 게 포인트지. 그래서 우리가 정설로 이야기하고 있는 명성황후가 진짜 명성황후가 아닐지도 몰라요 하는 것. 그래서 다양한 액자로 다양한 시선, 즉 밴티지 포인트 (vantage point)를 상징하는 거고.

 

무명: 아 그래서 여러 개의 액자가 나온 거네. 명성황후 본인(망자)이 본 자신의 모습, 백성들(연못에 매장된 망자들)이 본 명성황후의 모습, 선화(망자)가 본 명성황후의 모습, 민영익, 휘, 고종(남겨진 자들)이 본 명성황후의 모습.. 망자들에겐 "이런 일이 있었다" 사건을 재현하는 형태로, 남겨진 자들에겐 사건을 기억하는 형태로 나타난 인물들의 다양한 시선을 여러 개의 액자로 은유한 거구나! 음.. 그런데 우리 이 극 너무 영적으로만 접근하는 건 아니야? 우린 이 극을 망자의 현시+산 자의 기억으로 보지만.. 그냥 역순행적 구조를 가진 이야기 아니야? 이렇게까지 봐야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느끼시는 분도 충분히 있으실 법하고 그 분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기도 하고... 앗, 갑자기 내 해석에 자신이 없어졌어 (웃음)

 

휘: 사실 곤투와 잃얼은 여느 극들이 다 그렇듯 리뷰어와 그 관심사에 따라 다양한 리뷰글을 쓸 수 있어. 사학을 전공한 사람은 그 관점으로 리뷰할 수도 있고. 오태석 극작가의 <도라지>를 인상 깊게 읽은 사람은 그와 비교를 하는 관점으로 볼 수 있어. 극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극 자체의 문학적 완결성만을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spirituality의 관점에서 보기로 한 거고.

 

무명: 그래, 그럼 조금 안심은 된다. 내가 잃얼과 곤투에서 독특하다고 여겼던 건 아까 말한 대로 망자가 직접 자기 이야기를 할 무대가 있다는 점. 나는 그게 소중하다고 생각해. 잊고 산 것에 대한 깨움과 이음. 잃얼은 "저승길을 잘 찾아서 서천꽃밭으로 가시오." 곤투는 "내가 이 자리에 있었어, 앞으로도 있을 거야. 내 정신은 남아있을 거야. 홍종우, 와다, 동지들, 사람들에게 도라지꽃이 널리널리 피어날 것이야." 그들의 마음을 양분으로 삼는 도라지꽃 말이야.

 

휘: 그들이 썩어서 지더라도 그 양분으로 도라지꽃은 또 피겠지.

 

무명: 마치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내 안에 너 있다!! 네 안에 김옥균 있다. 수많은 나들아, 우리는 계속될 지어니~ 그런데 저번에 휘님이 와다가 종을 딸랑딸랑 치고 슥 나타난 김옥균의 혼이, 홍종우가 제주 목사 일을 하면서 지칠 때 본 김옥균의 혼이 실제 김옥균은 아닐지 모른다는 얘기를 했었지? 그거 듣고 내가 곤투를 왜 굿으로 생각하지 못했는지 또 하나의 힌트를 얻었었는데.

 

휘: 맞아, 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김옥균이 죽은 후 무대 위에 현신하는 김옥균은 마지막 솔로 씬의 김옥균을 빼고는 그 자체의 유령 같지는 않다고. 서로 자신이 생각하는 김옥균을 불러낸다고. 그래서 김옥균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 했다고 생각하는 와다나 자신이 김옥균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싸여있는 홍종우 앞에 김옥균이 나타날 때만 치는 대사는 “내 몸은 어디에 있는가”이고. 혁명동지들이 죽음을 결사하고 준비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김옥균은 무대 왼쪽 상승부에서 그들을 독려하는 모습의 지도자 김옥균이지. 마지막 김옥균 솔로는 김옥균 자체의 이상이라는 느낌이고.

 

무명: 진짜 김옥균 망자가 그들에게 나타났기 보단 “김옥균이 이 자리에 나타난다면 나한테 그럴 거야,” 라는 그들의 상상이라는 거잖아. 마지막 넘버 "저 바다에 날"에서 불투명한 막이 싹 걷혀지고 김옥균의 혼이 걸어 나오는데, 그 김옥균이야말로 남겨진 자들의 상상이 아닌 진짜 김옥균의 혼일 거 같아. 그게 내가 잃얼과 차이를 두는 점인데. 잃얼은 쌍방향적 소통이야. 난 개인적으로 굿의 정수는 거기 있다고 생각하는데. 망자와 산 자과 “난 그랬어! 괴로웠어! 너만 괴로웠는지 아냐!” 하고 투닥거릴 때도 있고. “왜 내 사진은 없소? 고생 많으셨네. 사진 찍어드릴게” 하고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는 면도 생기고, 위로하게 될 때도 있고. 만신을 통해 죽음조차 뛰어넘어 대화가 가능해지고 망자, 산 자 모두에게 치유가 된 느낌이라면, 곤투는 그런 존재가 없었던 만큼, 죽음이란 벽은 그대로 있고. 각자 할 말하는 느낌. 망자와 산 자간에 엉킨 실이 풀리지는 않은 거 같아. 각자 내가 아는 살아생전 김옥균이 있을 뿐.

 

휘: 으음, 아까 말했던 "명성황후의 혼은 보냈지만 김옥균의 혼은 남아있을 것 같다"는 부분 있잖아. 극적 특징으로 그 증거를 보여주는 장면들도 있어. 잃얼에서는 무대 조명이 켜진 상태로 명성황후와 억울하게 죽은 궁녀들, 선화가 같이 퇴장해. 휘가 보내주지. 곤투는 무대 조명이 꺼질 때까지도 김옥균은 퇴장하는 건 아니야. 퇴장하는 건 김옥균으로서가 아니라 배우로서의 인물이지. 예를 들어 김옥균이 퇴장하는 게 아니라 임병근 배우가 퇴장하는 그런 셈? 김옥균은 그 자리에 남아있을 거야.

 

무명: 아~일단 김옥균 “배우”는 퇴장하긴 해도 그 빈 무대에 김옥균의 사념은 거기 남아있을 것 같다는 얘기지? 잃얼은 극이 끝난 자리에서 소지까지 다 태운 곳에서 아무 혼도 안 남아있는 느낌이라면 곤투는 관객도 스태프도 모두가 우르르 나가서도, 조명이 모두 꺼진 그 자리에서도 남아 있는 김옥균이 시퍼렇게 눈 뜨고 남아있을 것 같은 느낌?

 

휘: 맞아. 무당인 휘를 제외하고는 어떤 인물도, 음향 등의 어떤 극적 요소도 남지 않아.

 

 

 

곤투의 역사 접근 방식

 

휘: 그래서 곤투가 역사왜곡이라는 이야기가 되게 많잖아. 음... 그런데 나는 곤투의 김옥균을 역사의 김옥균 자체로 봐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사실 이 극의 김옥균은 되게 <레 미제라블>의 앙졸라 같고 영웅시 되어있지. 이게 과연 팩트 김옥균일까? 글쎄, 아닌 것 같아.

 

무명: 잃얼이랑의 차이점이기도 하네. 잃얼은 다양한 시선이 있을 수도 있다는 관점이잖아. 저 사람 입장에선 그랬겠네, 이 사람 입장에선 그랬겠네, 이모저모 생각하다 보니 진실에 더 다가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곤투는 픽션에 그친다는 느낌. 곤투는 하고 싶은 이야기의 주제(도라지꽃은 이어진다)가 있고 그 주제에 맞게 김옥균의 몇 면모를 부각한 듯한.

 

휘: 곤투는 인물을 수단으로 하여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지. 그래서 사람들 안에 우리나라를 이어갈 원동력? 트라우마에도 계속 싸워 나갈 힘이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나. 그 힘이 김옥균으로 많이 뭐랄까, 나타나는 느낌이야. 그런 걸 보면 곤투는 "김옥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극은 아닌 것 같지. 김옥균이 메인 디시가 아니야.

 

무명: 음, 확실히. 김옥균을 차용한 게 아닐까 싶어.

 

휘: 잃얼과의 차이점인 게, 잃얼은 그 인물들 자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건 조금은 있는 것 같아. 잃얼도 뭐, 현대인들의 트라우마 보듬기가 더 큰 것 같지만 말이야. 관객들을 압도하고 눈물 흘려 카타르시스를 겪게 하는 종류의, 그런? 하지만 곤투에서의 역사는 정말 들러리 아닐까 싶네. 그야말로 수단. 어떻게 보면 곤투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지.

 

무명: 나도 이게 곤투에 대한 아쉬움이야.

 

휘: 그래서 “차라리 역사인물을 쓰지 말고 다른 인물을 썼으면 어떻냐” 하는 제안도 내 트위터 타임라인에 돌았던 것 같아. 하여튼, 곤투는 비판받을 여지가 참 많아.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 이용한다는 것. 이 접근이 싫은 사람들도 분명 많을 테고, 내 탐라의 트친님이 이야기해주신 것처럼 이게 역사 교육적으로 악영향을 줄 수도 있어. 동의해. 더군다나 아프고 민감한 부분의 역사잖아. 하지만 난 왜 이 시대를 이용했는지는 알 것 같아. 이 시대를 놓치기가 아깝지. 조선의 끝이잖아. “오백 개의 하늘이 진다”부터 시작해서 경술국치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은 끝나". 하지만 곤투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거기서 끝이 아니라 김옥균이 이어가는, 남기고자 하는 희망이 아닐까 싶네. 그래서 난 왜 요즘 연출가가 트위터에서 현 시국을 이야기할 때 김옥균과 홍종우를 떠올리며 그들의 대사를 트윗 하는지 알 것 같아. 게다가 그런 연출가의 이런 트윗도 있었거든: "미장센적으로 과거 재현은 영화를 따라갈 수 없다.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 정말 그런 극 같아. 과거에 대해, 역사에 대해 실존 인물 김옥균에 대해 이야기하는 극이 아냐. 현재 우리가 무엇을 이어갈지, 미래로 무엇을 전달할지에 대한 극 아닌가 싶어.

 

무명: 그럼 자캐 (자작캐릭터)...? 같기도 한데? 근데 자캐가 너무 매력적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휘: 맞아, 자캐. (웃음) 그래서 이걸 정말 역사 인물이네요, 역사극이네요 하면 좀 애매하지 않을까 싶어.

 

무명: 그렇다고 해서 역사인물을 써놓고 이 극의 역사인물은 그 역사인물은 아닌데요?? 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않아?

 

휘: 맞아, 맞아. 그건 곤투가 세상에 나온 이상 끝까지 안고 가야할 비판점이자 논란점이야.

 

 

 

마무리하며

 

무명: 개인적으로 내가 계속 밀고 있는 건, 두 작품 모두 잊혀진 영혼들과 직접 대면시켜준다는 거야. 이게 두 작품의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점 같네. 관련 분야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고맙고 놀라웠지. 영적 소통을 특이한 "특징"으로 끝내기에는 그에 본질이 더 있지 않나 해.

 

휘: 그 본질이라는 게 뭐야?

 

무명: 평소에 우리가 접하지 못 하고 느끼지 못 하는 영적 체험이라는 걸 들고 왔다는 것. 예전에는 인간이었을, 지금은 구천을 떠도는 영혼일 수 있는 자들과의 관객으로서 교류를 할 수 있다는 게 제일 좋았던 것 같아. 창작팀은 과연 이런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영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입장이라 더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네.

영화 <사도>에서도 그렇잖아. 영화 <사도> 보신 분들은 마지막 장면, 부채춤 기억나시려나? 어떤 이들은 뜬금없다고 했던 씬, 정조의 즉위식 장면에서 영화가 끝났다면 깔끔하지 않았을까 아쉬웠다고 하는 씬. 나도 그 부분 보면서 "와, 이 씬 어떤 이들에겐 극적 분위기가 절정까지 갔다가 훅 떨어진, 지루한 장면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싶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나한텐 완전 감동이었어.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부채춤. 당신을 이해하고자 한다는 정성. 당신과 교류하고자 합니다.. 남겨진 자들의 신호. 잃얼에선 굳이 마지막에 소지 장면을 넣은 것, 곤투에선 굳이 마지막에 김옥균 혼의 독무대를 꾸며준 것이 그런 맥락 아니었을까.

그리고 간다, 남는다 직접 그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 좋았어. 간다, 남는다 그것이 그 누구의 상상보다는 혼들이 직접 스스로 선택한 길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휘: 잃얼은 보내주는 것, 곤투는 남아있는 것이라는 것에서 더 느껴지는 건데, 역사적 트라우마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 모순되는 말이긴 한데, 트라우마는 보내줘야 하기도 하지만 잊어서도 안되지. 그 사람들이 여기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어야 해.

 

무명: 맞아, 계속 담아두고 상처입고 아파하기만 해서는 안 되지만 그래도 우리 나름의 정의도 필요하고 해소도 필요해. 그렇게 잃얼과 곤투가 한 쌍이지 않을까.

 

휘: 많은 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 극이지만 우리가 보았던 잃얼과 곤투는 그렇다는 것. 전에 누군가가 내 리뷰 보고 그랬었지. “꿈보다 해몽이시네요”라고. 하지만 바르트가 이야기했듯이, 꿈으로 비유되는 일종의 작품을 work가 아닌 text로 보아 그 작품에서 해석을 끌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 아니겠어? 내가 문학 공부하면서 배운 가장 큰 점이 그거야. 그래서 나는 이 대담을 읽어주시는 고마운 분이 계신다면, 이 대담은 “이건 이렇다!”하는 단 한 가지의 해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도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하는 한 가능성의 제시로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참고한 문헌:

김성례,제주 무속: 폭력의 역사적 담론

김성례,한국 무교의 정체성과 종교성: 쟁점 분석,1997

명성황후해원굿 보존회, 명성황후 해원굿 연구, 민속원, 2008

박일영,샤머니즘에서 본 욕망의 맞이와 풀이,2009

키스터 다니엘 A.,삶의 드라마-굿의 종교적 상상력 연구-,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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